viernes, 30 de diciembre de 2011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2년 새해에도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과달루페선교회가 한국에 진출한지 금년 50주년됩니다
하느님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합니다

jueves, 22 de diciembre de 2011

성탄 축하합니다



등불을 밝히고 싶은 성탄절입니다.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겸손히 받아 안으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갓 태어난 기쁨과 희망을 정성스레 모아
선물입니다.
언제나 저희 과달루페회에 보여주시는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 큰 신비 안에서
기쁜 성탄과 희망찬 새해 되기를
기도 드립니다


2011. 성탄
한국 지부장 유진오 신부와 과달루페회 가족 인사 드립니다




viernes, 2 de diciembre de 2011

한국 진출 50 주년을 맞이하는 과달루페 외방선교회를 위한 기도문




한국 진출 50 주년을 맞이하는
과달루페 외방선교회를 위한 기도문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
지난 50년간 땅에서 복음을 선포하여
활동해온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사제들에게 감사하며 하느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다른 외방선교회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애쓰는 과달루페 선교회 사제들은
이제 한국 진출 50 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성령으로 쇄신된 마음으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복음화를 위하여
나아가도록 우리 모두를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함께 힘을 모아
생명문화와 민족화해의 수호자이신 과달루페
성모님의 도우시므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생명을 보호하는 풍조가 자리 잡고 갈라선 민족이
하나 되어 당신의 나라가 임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 과달루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jueves, 27 de octubre de 2011

메리놀 외방선교회 설립 100 주년 기념 감사미사

청주 내덕주교좌성당 
 주교님들과 메리놀외방 선교회 기념 사진
 함 신부님 (중)메리놀회 한국지부 와 과달루페회 신부님들 기념 사진
함 신부님 성직자 수도자와 기념 사진




jueves, 20 de octubre de 2011

교황 베네딕도 16세 전교주일 담화(요약)



교황 베네딕도 16세 2011년 제85차 전교주일 담화(요약)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 20,21)

가서 선포하여라
이 명령은 전례 거행, 특히 성찬례 거행 때마다 계속 되살아납니다. 성찬례는 언제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가서…선포하여라.’(마태 28,19 참조) 하신 그 명령으로 끝납니다. 전례는 언제나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 ‘세상으로’ 보내는 새로운 파견입니다. 우리가 전례에서 체험한 것, 곧 하느님 말씀과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가 지닌 구원의 힘을 세상에서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이에게
복음 선포는 모든 민족들을 향한 것입니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성부의 계획에 따라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선교 교령 2항). 복음 선포는 “교회의 고유한 은총이고 소명이며, 교회의 가장 깊은 본성입니다. 교회는 복음화를 위하여 존재합니다”(「현대의 복음 선교」,14항). 따라서 교회는 결코 자기 안에만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구체적인 장소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그 밖으로 뻗어 나아갑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그분의 은총과 사랑으로, 교회는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들에게 온전히 현존하여,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이끌어 줍니다(선교 교령 5항 참조)

모든 이의 공동 책임
세계 선교라는 보편 사명은 모든 이와 모든 것 그리고 모든 시간을 다 포함합니다. 복음은 받은 사람만이 독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야 할 선물이고 전해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이 선물을 나누어 주는 사명은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세례 받은 모든 이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세례 받은 모든 이는 “선택된 겨레이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1베드, 2,9)이므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선포하여야 합니다. 

세계의 복음화
전교주일날 교회는 교황청 전교 기구를 통하여 전교 지역의 복음화 활동을 위한 후원을 요청합니다. 이 후원은, 교리교사와 신학생과 사제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고 지탱하는 데 필요한 기구들을 돕는 것이며, 특히 가난과 어린이 영양실조, 질병의 만연, 보건과 교육 문제가 심각한 나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데에 직접 기여하는 일입니다. 인류의 현세 문제에 대한 무관심은 예수님의 삶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사명에 공동 책임을 지고 참여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친교와 평화와 연대를 이룩하는 일꾼이 되어 온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행하는 데에 협력해야 합니다. 이때 부딪히는 어려움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헤쳐 나가야 하며, 모든 이가 함께 걷는 그 여정의 핵심은 선교입니다. 

전교 주일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인류에게 ‘가서’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려는 열망과 기쁨을 되살리기 바랍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특히 복음을 위하여 크나큰 노고를 기울이는 분들에게 교황 강복을 보내 드립니다.

바티칸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

jueves, 18 de agosto de 2011

추가브리엘 신부님 선종



지난 8 5일 오후4 55분 멕시코 만사니요 골리마(Manzanillo, Colima)에서 추가브리엘 신부님이 선종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쾌활하고 활력이 넘치는 분으로 아이들에게는 신기한 마술을 보여주는 마술사 신부님으로 통하였습니다. 한국 신자들은 추가브리엘 신부님을 항상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고 유머가 풍부하여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어른 아이 구별 없이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겸손한 신부님으로 기억합니다.
추신부님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0 1 6일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선교사제의 성소를 키워나갑니다. 멕시코시티 대신학교에서 선교사 교육을 받고 한국으로 파견된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유학생 첫 번째 팀으로 1969 9월 한국에 입국하여 1971 3월 서울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하였고 과달루페회가 광주교구에서 선교사제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듬해 광주가톨릭대학교로 편입, 1973 8 15일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부제품을 받고 멕시코로 돌아가 1974 10 6일 멕시코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후 1975 4 10일 과달루페회 선교사제로서 한국에 다시 오셨습니다.
신부님은 사제로서 성소후원회 책임자, 신학생들의 교육 담당, 본당사목, 세 분야에서 활동하셨고 한국에서는 부산교구, 서울교구, 광주교구의 여러 본당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지인 수녀님께 보낸 편지에 선교활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소망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을 만큼 신부님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나 마다않고 찾아가 행동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신부님의 선종 소식을 듣고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계셨던 자양동 성당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신부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한 미사가 봉헌되었고 순천 과달루페 본부에서도 조곡동성당, 금당성당 신자들이 본부의 성당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많이 참석해 신부님을 애도하며 신부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미사참례를 하신 어떤 자매님께서는 한국을 떠난 지 1년 밖에 안 된 신부님의 갑작스런 선종 소식을 믿을 수 없다며 눈물을 흘리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좋은 분이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 사랑하는 친구였고, 동창이었으며, 목자요, 선교사이셨던 추가브리엘 신부님과 이별을 하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재회를 기약했습니다.
“가브리엘 신부, 주님의 축복을 받으시길 빌며모든 수고를 주님께서 갚아 주시길 빕니다!!
주님!, 가브리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martes, 9 de agosto de 2011

추 가브리엘 신부님 선종

추규응 가브리엘 신부님 약력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소속)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추규응 가브리잉 (Gabriel Casillas Horta) 신부님은 (향년 67세)께서 한국지각으로 8월 5일 (금) 오후 4시55분 본국인 멕시코에서 지병으로 선종하셨습니다.

  1969년에 신학생으로 한국에 입국한 신부님께서는 서울과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한 후, 1974년 10월 6일 본국에서 사제품을 받으셨습니다. 이후 1975년에 한국에 파견돼 고흥, 구례, 쌍촌동, 조곡동 본당 및 서울 자양동과 부산 사직동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하셨습니다.

 미사와 기도 중에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빌어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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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멕시코
1944.11.29
소신학교 입학
1960.1.6
한국 입국 (신학생)
1969.09.10
서울가톨릭 대학교 입학
1971.03.09
광주가톨릭 대학교 편입
1972.03.01
부제품 (광주대교구: 조정동 성당)
1973.08.15
사제품 (멕시코)
1974.10.06
한국 재입국
1975.04.10
고흥 본당 주임
1975.06.25
자양동 본당 주임
1978.08.26
과달루페 한국지부 성소 지도 신부
1979.04.21
쌍촌동 본당 주임
1983.09.02
과달루페회 대신학교 부학장
1984.08.14
과달루페회 후원회국 총무 - 국장
1989-2002
광주대교구 조곡동 본당 주임
2002-2004
서울대교구 자양동 본당 보좌
2005-2008
서울대교구 자양동 본당 주임
2009-2010
과달루페회 후원회 국장
2010-
선종, 만사니요, 멕시코
2011.08.05. 오후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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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ingo, 10 de julio de 2011

옥현진 시몬 주교님의 서품식

옥현진 시몬 주교
"내안에 머무러라"(요한15,4)
Manete in me

전님 무안 출생 1968.3.5
사제서품 1994.1.26
주교임명 2011.5.12
주교서품 2011.7.6
임동 대성당
천주교 광주대교구 

□ 지난 2011년 5월 12일 광주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된 옥현진(시몬) 주교의 서품 미사가 7월 6일(수) 오후 2시 광주대교구 주교좌 임동성당에서 거행되었다.

□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의 주례로 거행된 주교 서품 미사는 서품 청원, 임명장 낭독, 주교로 선발된 이의 서약, 안수와 도유 및 복음서 수여, 주교를 상징하는 반지와 주교관, 지팡이 수여, 평화의 인사 순으로 진행되었다.




평온심을 구하는 기도

평온심을 구하는 기도
 
하느님, 허락하소서.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심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는 지혜를.
하느님, 도와주소서.
제가 한 번에 하루를 살아가고,
한 번에 한순간을 즐기고,
어려움을 평화로 가는 길로 여기게 하소서.
예수님께로부터 배우게 하소서.
내가 생각하는 그런 세상이 아니어도,
이 고장 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제게 은총을 주소서.
저와 저희 형제자매를 위한 당신의 바램을 감싸 들인다면,
당신께서 모든 것을 올바르게 하시리라는 신뢰심을 주소서.
적당히 행복하게 하소서, 이 삶에서.
그리고
최고로 행복하게 하소서, 내세에서 당신과 함께.
아멘.
--라인홀트 니버 (Reinhold Neibuhr)--

miércoles, 25 de mayo de 2011

한국의 아들・딸 눈에 밟히지만 ・・・



 소선도 신부님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소선도 (Jose Sandoval I)신부

“꼭 다시 만납시다. 하느님 나라에서라도!
백발의 노신부는 반평생을 보낸 이국땅에서의 마지막 미사에서 애써 이별의 아쉬움을 감췄다. 멕시코 출신 소선도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78) 신부가 8일 서울 자양동성당 송별미사 주례를 끝으로 30여년 한국 사목활동을 마쳤다.
소 신부는 멕시코에서 사제품을 받을 당시 “더 가난한 나라에 가서 봉사하겠다”며 한국 선교사로 자원했다. 1967년 광주에 도착해 서울, 인천 등 여러 본당과 병원에서 사목했다. 그 중에서도 자양동본당은 소신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1975년 성수동본당 주임신부로 있을 때 그가 직접 터를 고르고 성당을 세웠기 때문이다.
자양동본당과 특별한 인연
“그때는 이 주변이 전부 배추밭이었어요. 이런 황무지에 성당을 세워 무엇하느냐고, 차라리 강남에다 짓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랬던 곳이 이렇게 신자들도 늘어나고 규모도 커진 것을 보니 너무 뿌듯합니다.
그가 굳이 자양동을 고집했던 이유는 당시 달동네였던 노른산의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노인들이 미사를 드리기 위해 먼 성수동까지 오는 것이 마음 아팠다. 그는 “성당이 완공되자 말도 못하게 좋아하던 신자들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소 신부의 ‘자양동 사랑’ 만큼이나 신자들의 소 신부 사랑도 각별했다. 해외발령을 받아 사목한 후 13년 만에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자양동본당 신자들은 소 신부가 좋아하는 빈대떡을 부쳐 합정동 수도원까지 찾아갔다. 그는 “그때 먹었던 빈대떡의 기막힌 맛이나, 자양동 할머니들 손에 이끌려 간 놀이공원에서 아이처럼 놀던 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고 회상했다.
10여 년 병원사목도
본당 청년들과의 기억도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다. 당시 성수동 부근에는 공장이 많아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여성 근로자들이 흔했다. 소 신부는 대학생 봉사자들과 함께 야학을 만들어 근로자들을 가르쳤다. 1년 뒤에 아가씨들에게 졸업장을 줬는데, 다들 감격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 아가씨들은 요즘도 만나는데, 아직도 나를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는 한국에서 마지막 10여년을 병원에서 보냈다. 신학생 시절 주말마다 결핵환자들을 돌보며 “평생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함께 하겠다”고 마음먹은 꿈을 제대로 이뤄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환갑을 넘긴 나이에 로마로 유학을 떠나 원목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18일 출국해 멕시코 야왈라카로 간다.
멕시코 가서도 빈민사목
“도시 변두리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봉사해야죠. 몇 년이 될지는 모르지만 힘 닿을때까지는 계속 봉사할 겁니다.
그는 ‘진짜 고향’으로 돌아가는데도 “한국의 아들딸들이 눈에 밟힌다”며 재회를 기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