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ércoles, 25 de mayo de 2011

한국의 아들・딸 눈에 밟히지만 ・・・



 소선도 신부님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소선도 (Jose Sandoval I)신부

“꼭 다시 만납시다. 하느님 나라에서라도!
백발의 노신부는 반평생을 보낸 이국땅에서의 마지막 미사에서 애써 이별의 아쉬움을 감췄다. 멕시코 출신 소선도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78) 신부가 8일 서울 자양동성당 송별미사 주례를 끝으로 30여년 한국 사목활동을 마쳤다.
소 신부는 멕시코에서 사제품을 받을 당시 “더 가난한 나라에 가서 봉사하겠다”며 한국 선교사로 자원했다. 1967년 광주에 도착해 서울, 인천 등 여러 본당과 병원에서 사목했다. 그 중에서도 자양동본당은 소신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1975년 성수동본당 주임신부로 있을 때 그가 직접 터를 고르고 성당을 세웠기 때문이다.
자양동본당과 특별한 인연
“그때는 이 주변이 전부 배추밭이었어요. 이런 황무지에 성당을 세워 무엇하느냐고, 차라리 강남에다 짓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랬던 곳이 이렇게 신자들도 늘어나고 규모도 커진 것을 보니 너무 뿌듯합니다.
그가 굳이 자양동을 고집했던 이유는 당시 달동네였던 노른산의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노인들이 미사를 드리기 위해 먼 성수동까지 오는 것이 마음 아팠다. 그는 “성당이 완공되자 말도 못하게 좋아하던 신자들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소 신부의 ‘자양동 사랑’ 만큼이나 신자들의 소 신부 사랑도 각별했다. 해외발령을 받아 사목한 후 13년 만에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자양동본당 신자들은 소 신부가 좋아하는 빈대떡을 부쳐 합정동 수도원까지 찾아갔다. 그는 “그때 먹었던 빈대떡의 기막힌 맛이나, 자양동 할머니들 손에 이끌려 간 놀이공원에서 아이처럼 놀던 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고 회상했다.
10여 년 병원사목도
본당 청년들과의 기억도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다. 당시 성수동 부근에는 공장이 많아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여성 근로자들이 흔했다. 소 신부는 대학생 봉사자들과 함께 야학을 만들어 근로자들을 가르쳤다. 1년 뒤에 아가씨들에게 졸업장을 줬는데, 다들 감격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 아가씨들은 요즘도 만나는데, 아직도 나를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는 한국에서 마지막 10여년을 병원에서 보냈다. 신학생 시절 주말마다 결핵환자들을 돌보며 “평생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함께 하겠다”고 마음먹은 꿈을 제대로 이뤄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환갑을 넘긴 나이에 로마로 유학을 떠나 원목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18일 출국해 멕시코 야왈라카로 간다.
멕시코 가서도 빈민사목
“도시 변두리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봉사해야죠. 몇 년이 될지는 모르지만 힘 닿을때까지는 계속 봉사할 겁니다.
그는 ‘진짜 고향’으로 돌아가는데도 “한국의 아들딸들이 눈에 밟힌다”며 재회를 기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