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es, 10 de noviembre de 2014

Alberto Puente Colunga 특별한 하느님의 부르심


8천명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고향에서 저희 부모님과 7남매는 풍족하진 않았지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저는, 일반대학을 졸업한 후,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면서 주말마다 집에 와서 보좌신부님과 함께 주임신부님과 성당일을 도와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마음속에 남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떠올랐습니다.
많은 신자분들이 신부님보다는 저에게 반갑게 인사하고, 사제가 아닌 저에게도 신부님을 대하듯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특별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제 서품식을 마치고 (부모님과 7남매)


주님의 뜻에 맞는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목자의 삶
그러나, 그때 저는 초등학교 근무를 하면서, 동생들을 경제적으로 뒷바라지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신학교에 들어갈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동생이 대학을 졸업할때까지 기다리고, 다른 동생들을 부탁한 후 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이다는 생각을 항상 마음에 담고, “내 뜻보다는 주님의 뜻에 맞는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목자의 삶이 어떤 것일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 신부로 살고 싶었고, 아프리카로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주님은 한국으로 저를 부르셨으며 지금은 행복한 마음으로 사목하고 있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언어였는데, 제 언어능력의 한계에 대해서 많은 실망을 했습니다.
멕시코에서는 제 생각을 자유스럽게 표현할수가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제 생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신자분들과도 의사소통이 힘들어서 심적으로 무척 어려웠습니다.
특히 광주 신학교 때는 언어 때문에 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그때 “걱정하지

마라” 주님께서 이끌어 주신다는 지도 신부님의 격려 말씀과 신학생들의 도움으로 편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저는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어린학생들의 마음으로 돌아가 공부하면서, 가르쳤던 어린이들 생각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신자들안에서 우리 가족의 모습을…
선교사 신부는 “만나는 모든 신자들 가운데에서 가족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지도신부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항상 신자들안에서 우리 가족의 모습을 느끼기 위해 기도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는 본당활동을 하면서 신자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즐겁고 감사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처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삶을 통해 말씀을 실천하면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곳에서 열매를 맺는 착한 목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저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과달루페 외방선교회를 위하여 기도와 후원을 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과달루페 선교회 모든 신부님들도 여러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viernes, 29 de agosto de 2014

}…너를 선택했으니 꼭 네가 해야 하며…~ 박대민(Fermin Parra Conzalez) 신부

박대민(Fermin Parra Conzalez) 신부

제가 한국에 오기 전에는 고향과 가족이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새로운 고향과 가족을 하느님께서 주셨습니다.
이 새로운 고향이 한국이고, 새로운 가족은 우리 과달루페외방선교 후원회 공동체입니다.
앞으로 제가 어디서 사목 활동과 사제 선교활동을 하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저는 1993년부터 예수님을 따르고 있고, 앞으로 죽는 날까지
예수님을 따르고 봉사하려고 합니다.
한국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나서 반갑고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과달루페 외방 선교 후원회 가족 여러분! 사랑합니다.
-AMIGOS PARA SIEMPRE(영원한 친구인) 박대민 Fermin 신부-

▪ 1976년 Mexico Monclova 출생
▪ 2003년 3월 한국 입국
▪ 2004년 서강대학교 한국어 공부
▪ 2006년 부제서품(염주동 성당)
▪ 2006년 2월 금호동 성당 사목 실습
▪ 2007년 6월 사제서품(멕시코)
▪ 2007년 이후 멕시코에서 활동
▪ 2014년 7월 한국 입국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찬미 예수님!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저는 사랑의 선교사입니다.
어디든지 예수님께서 저를 부르시면, 제가 그곳으로 가서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려 합니다. 지금부터 사랑의 선교사가 되고 싶은 저 페르민이 누구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박페르민 신부입니다.
저는 멕시코 북쪽에서 태어났고, 고향은 먼클러바(Monclova)입니다.
제 고향은 미국 텍사스 바로 아래에 있고, 멕시코에서 제일 크고 유명한 강철공장이 있습니다. 사막지역이라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가족도 아름다운 사람들인데,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그리고 남동생 3명의 가족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선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7살에 Saltillo 교구 신학교에 들어갔고, 22살에 과달루페외방 선교회에 들어갔으며, 미국에서 영어 공부를 했습니다.
한국에는 2003년 3월21일에 왔는데 아는 사람도 없었고, 한국어를 해야 한국인들하고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너무 힘들었는데, 의사소통이 안 되고, 먹는 음식도 다르고, 친구들도 없고 문화도 달라서 저는 한국인 박대민으로 다시 태어나야 했습니다.
서강대학교에서 2년 동안 한국어를 배우면서 한국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 후 광주 가톨릭 대학교에서 1년 동안 생활했는데 수업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다 좋았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공부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교수님들께서 수업 때 어려운 한자말로 설명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지금 전 한국에서 너무 힘듭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금호동 성당에서는 좋은 신부님들과 좋은 공동체분들을 만나서 매우 행복했습니다.
특히 주임신부님, 보좌신부님께서 많이 도와주셨는데 지금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본국으로 다시 돌아 갔다가 지난 2014년 7월12일에 한국 선교를 위해 다시 왔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과달루페외방선교 후원회라는 새로운 가족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을 후원회 미사에서 처음 만났을때, 아버님, 어머님, 형님, 누님처럼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한국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나게 되어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그들에게 나의 일을 맡길 수도 있지만, 내가 너를 선택했으니 꼭 네가 해야 하며,
네가 나의 청을 들어 너의 중재와 도움으로, 나의 뜻이 완성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니칸모포우아 59-

이 말씀을 가슴에 두고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평화안에서 박대민 Fermin신부 씀









jueves, 7 de agosto de 2014

그러나 순명하여 2011년 1월 추운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리고(Rigoberto Colunga Hernandez) 신부

어느 날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신부님께서 아프리카 선교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그때부터 ‘나도 언젠가는 아프리카로 선교를 가야지’하고 맘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가서 선교하라는 말씀에 순명하고, 지금은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중국 신학교 기숙사가 완공되어서 새로운 학생들이 생활할 수 있게 되어 너무 기    쁘고, 감사드립니다. 지금처럼 계속 관심과 도움 그리고 기도 부탁드립니다.
회원님들의 가정에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길~.         -리고 신부-

      ▪ 1975년 Mexico Rio verde 5남 1녀중 차남 
      ▪ 2004년 한국입국. 어학 공부 후, 광주신학교에서 2년 6개월 수학
      ▪ 2007년 부제서품(광주신학교)
      ▪ 2008년 6월 사제서품(멕시코)  
      ▪ 2009년1월-2010년8월  서울 자양동 성당 보좌신부
      ▪ 2011.1월-현재 중국장춘 어학공부
      ▪ 2012년-현재 길림 대신학교에서 스페인어 강의. 면담. 고해성사

하느님의 부르심
어린 시절 본당에 복사단이 처음으로 생기고, 형과 함께 복사를 서게 되었습니다. 
아주 어렸고 뭐가 뭔지 잘 몰랐지만, 가슴 떨림과 함께 신부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성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소망하던 소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어느 날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신부님께서 아프리카 선교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그때부터 ‘나도 언젠가는 아프리카로 선교를 가야지’하고 맘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나의 첫사랑 자양동 성당
아프리카 선교가 꿈이었지만, 한국으로 가서 공부하라는 말씀에 순명하였습니다. 한국은 언어도 어렵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광주신학교에서 2년6개월 수학 후 부제품을 받고, 1년 후에는 멕시코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후, 보좌 신부로써 처음 부임한 곳이 나의 첫사랑과 같은 자양동 성당이었습니다. 
유대철 어린이 공부방, 스페인어 공부방을 처음으로 만들었고, 탁구대도 설치하여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친교를 나눌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모두들 많이 이용하였고 즐거워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탁구대 덕분에 교우가 아니더라도 웃으면서 먼저 인사하는 청소년, 어린이들이 많이 있어서 더욱 행복했습니다. 
짧았지만 즐겁고 행복했던 첫사랑의 기억만 남아있습니다.  


나를 부르는 중국
이제 한국어도 익히고 행복해 할 때 지부장 신부님께서 혹시 중국에 관심있냐고 물으시길래 관심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발령을 내리셨습니다
관심 있다고 말씀은 드렸지만, 사실 저의 마음한편은 가고 싶지 않다는 그런 심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순명하여 2011년 1월 추운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선교사로서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가 없기에 신부신분을 감추고, 오로지 학생신분으로 장춘에서 어학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공부하다보니 중국어도 잘 배우고 다른 일반 학생들과도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친구라 생각하고 불쑥 찾아와서 언제 결혼할거냐고 묻기도 했는데, 신부임을 말 못하고 학생신분으로만 생활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장춘에서 3시간 걸리는 길림대신학교에서 2012년부터 스페인어 강의와 주일에는 고해성사와 면담 그리고 신학생과 다른 교구 사제들의 지도신부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주일을 거룩히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애국교회와 지하교회간의 협력의 중간자로서
중국교회에서 세미나 혹은 단체를 만들어 봉헌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길림의 애국교회, 지하교회가 서로 무관심하던 관계에서 도움을 주는 관계가 되는데 중간 역할을 하였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영하 40도~50도의 추운 날씨에 새벽5시부터 밤11시까지 고해성사를 주었던 일입니다. 좁은 고해실에 앉아 있으면 온 몸이 얼어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체감온도는 밖의 온도 보다 훨씬 더 내려갔고, 중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언어가 부족한데도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신자들의 말을 알아들 수 있었던 건 신비일 뿐입니다.
추운 겨울에 일이 없자 신자들은 평일 3대의 미사를 모두 참례하곤 합니다.
무릎을 꿇고 강복받길 원하는 순수한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제 어학공부도 마치고 중국에서 대학교수로 활동할 수 있도록 노력중입니다.

후원회원 여러분께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중국 신학생들이 보다 안정되게 생활할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쁘고 감사드립니다. 지금처럼 계속 관심과 도움 그리고 기도 부탁드립니다. 
회원님들의 가정에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길.

중국 신학교 건립 지원


  우리의 정성어린 후원금이 어려운 중국 천주교회의 신학교 건립에 보태어 졌습니다. 
  지금까지 3만1천 달러가 지원 되었으며, 앞으로도 1만5천 달러가 더 지원될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어느 곳 이나 항상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우 이냐시오(Ignacio Garza Evia Ugarte) 신부

과달루페 성모님의 모습과 정신으로 활동하고 계신 후원회 여러분들께 진심으로감사의 말씀 드리며, 선교사 신부님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더 깊이 묵상하고, 성모님의 평화를 가지고 살기 바랍니다.” - 이냐시오 신부-



1948Mexico. 10남매중 막내로 출생 ▪ 1972년 광주신학대 졸업
1974년 사제서품 (멕시코) ▪ 1974-1978년 멕시코 소신학교 지도 신부
1978년 한국 재입국. 소록도 성당 주임신부(4개월) 성수동 성당 주임신부
1978-1982년 부산 사직동 성당 주임신부 ▪ 1982-1982년 고흥 성당 주임신부
1983-1987년 멕시코 대신학교 지도신부 ▪ 1987-1991년 광주 쌍촌동 본당 주임신부
1991-1997년 순천 매곡동 성당 주임 신부. 한국 지부장 ▪ 1997-2003년 멕시코 과달루페 부총장
2006-2007년 광주 망운성당 주임 ▪ 2007-2011년 순천 가롤로병원 원목실
2011- 현재 중앙대병원 원목실


과달루페 외방 선교회 신부님들과의 만남
제가 선교사 신부의 꿈을 처음 갖게 된 것은 초등학교때입니다.
다니고 있던 초등학교에 과달루페외방선교회 신부님들께서 방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을 모이게 하신 후, 성소와 선교에 대해서 강론을 해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7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강론이 쉽게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만, 막연히 선교사 신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며 살고 계시는 신부님들이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소신학교에 보내달라고 부탁하였지만, 버스로 12시간이나 걸리는 과달라하시에 있는 학교까지 어린 저를 보내는것을 걱정하셔서 반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해년마다 부모님께 똑같은 부탁을 드렸고, 결국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중.고등 과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대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예수회 신학생들이 외국에 나가서 활동한다는 말을 듣고, 저도 공부를 마칠 즈음에 한국 선교활동을 신청하여 선교사로 오게 되었습니다.
가끔씩 ‘하느님이 나를 부르셨을까? 아니면 내 고집으로 신학교에 왔을까?’ 라는 의문을 갖기도 했지만,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는 주님께서 저를 부르시고, 어느 곳이나 항상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지금까지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저를 통해서 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
멕시코 대신학교 지도 신부로 지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부임 받은 광주 쌍촌동 성당은 시설이 열악했습니다. 공소만 있고, 예비자 교리실이나 레지오모임 공간도 없고, 오로지 성당밖에 있는 교리실 한 개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주님께서는 저를 통해서 큰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신자들과 힘을 합하여 성당 재건축 사업이 이루어졌고, 그때의 보람은 잊을수가 없습니다. 차츰, 후임 신부님께서 사제관, 수녀원, 주차장등을 건립하면서 만족할만한 성당으로 거듭났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믿음과 받아들임
저는 지금 병원 원목실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신자들을 통해서 신앙심을 더 굳건하게 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임종을 앞둔 말기암 환자인 남편을 정성껏 간호하던 젊은 부인의 모습을 통해서 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굳건한 믿음 안에서 남편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며, 선종할 수 있도록 기도하던 모습을 보고 사제인 저도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자매님의 모습을 통해서, 저도 또 한번 배웠습니다.


성모님의 모습과 정신으로 활동하고 계신 후원회 여러분께 감사

저는 앞으로 현재 하고 있는 활동들을 계속하면서, 주님의 도구로써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게 주어진 선교 사명이 끝나는 날에는 가족들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갈 계획입니다.
믿음을 지키며, 소임을 마친 선교사들을 주님께서 보살펴 주시리라 믿으며……
마지막으로 과달루페 성모님의 모습과 정신으로 활동하고 계신 후원회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선교사 신부님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더 깊이 묵상하고, 성모님의 평화를 가지고 살기 바랍니다.

벤자민(Benjamin Marin Cano) 신부

아무리 힘들어도 기쁜 마음으로…”
벤자민(Benjamin Marin Cano) 신부

한국말 구사에 거침이 없으시기 때문에 신자들과 격의 없이 대화하시는 벤자민 신부님의 한국생활을 싣는다. 대를 이어가야 한다는 자식으로서의 고민도 많았지만, 신부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선교사의 길로 들어서게 했고 외방선교회의 신부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 근무를 지원하셔서 지금은 광주대교구에서 유일하게 선교사 신부님 사목지인 순천 상사성당 본당신부로서 활동하고 계신다. 연세가 많으신 신자들과 함께 교육관을 마련하고, 별량공소를 신축하는 등 열정적인 사목활동을 펼치고 계신다. -편집자 주-
▪ 1963Mexico city. Mexico 출생 ▪ 1982년 고등학교 졸업
▪ 1989년 대신학교 졸업 ▪ 1992년 한국 입국후, 2월에 광주 신학교 입학
▪ 1994년 부제품 (멕시코) ▪ 1995년 사제서품 (멕시코)
▪ 1995-1998년 멕시코대학 지도 신부 ▪ 1998-1990년 대부도 성당 보좌 신부(8개월)
▪ 1999-2002년 신기동 성당 보좌 신부 ▪ 2002-2004년 자양동 성당 보좌 신부
▪ 2004년 조곡동 성당 보좌 신부 ▪ 2005년 조곡동 성당 주임 신부
▪ 2009년 망운성당 주임신부 ▪ 2012- 현재 상사성당 주임신부

어릴적 꿈
저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카톨릭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수녀 선생님에게서 선교사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4학년 아마 10살경 쯤 신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학교 수사님이 되고 싶었지만, 6학년 때 처음 만난 과달루페회 신부님이 우리 학교 학생들을 초대하여 신학교에 방문했을 때부터 예비 신학생이 되었어요.
매월 2번씩 신학교에 다녔고, 피정이나 방학 때마다 신학교에 가서 신부 되기를 기도했지만, 아버지가 허락을 안 해주셨기 때문에 소신학교 때는 결정을 못하고, 고등학교 졸업후에 신학교에 가길 결정했어요.
제가 장남이고, 벤자민 3세여서 신학교에 가면 대가 끊긴다는 생각 때문에 반대하셨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막을 순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의 선교사 생활
처음에는 일본에서 선교사 활동을 하고 싶었지만, 안두수 신부님께 한국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듣고 나서, 수련기가 끝난 3년 후에 한국에 가는 것을 신청했어요.
신학교에서의 생활은 일반 학교와는 달리 공부하고, 기도하고, 청소하고, 운동하고,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생활하기가 조금 어려웠어요. 하지만 신학교 생활이 너무 좋아서 한국에 빨리 가고 싶었고, 도착 하자마자 너무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한국말 공부가 가장 어려웠지만, 모두 다 새로웠고, 사람들은 친절해서 재미있게 살았어요.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행복하게 생활했어요.
지금도 가끔씩 언어나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에 어려운 점이 있지만,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 더 많습니다. 이렇게 한 20년 정도 한국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 사목활동 하면서도 큰 어려움은 많지 않았어요.
한국사람들이 대부분 친절했기 때문인데, 상사 성당 사제관과 교육관 건립할 때는 재정문제 때문에 조금 힘들었어요. 그때 별량 공소도 같이 공사 하고 있어서 신자분들께 부부담을 드려서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바자회때에는 근처에 있는 본당 신자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큰 힘이 되었는데,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희망과 믿음과 사랑 안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
저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희망과 믿음과 사랑 안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 신부가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 신자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갖고, 아무리 힘들어도 기쁨 마음으로 사제생활을 하고 있어요.
과달루페 후원회원들께서도 어려움 중에 하느님의 희망과 믿음 속에서, 항상 기쁜 마음으로 생활하시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상설고해소 운영순천 과달루페 본부에서 매주 금,토요일(오전10-오후5) 고해성사
병원 사목 활동순천 메디팜 병원과 평화병원에서 매월 둘째, 넷째주 수․목요일 봉성체
멕시코 성지 순례단 모집의문사항은 지부의 수산나 자매님께(061-726-5389)
20151월에 성지순례 예정이며, 희망하시는 분은 매월 십만원을 기본으로 입금해 주시면 적립하겠습니다.

순천지역 미사및 회합 626() 730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본부
서울지역 미사및 회합 617() 2합정동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2호선 합정역 7번 출구에서 합정마트앞 도로 직진하여 동원아파트 뒷편 절두산성지 담 사이길)





sábado, 10 de mayo de 2014

천국을 훔친 네 명의 할머니 안토니오 마스코로 신부가 케냐 선교공동체에서 신앙의 본보기를 보인 네 할머니에 대해 쓴 글입니다.

후원회원님들 성지에서 재회의 기쁨을 나누다.-
과달루페 선교후원회 두 번째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순천과 서울회원 80여명이 함께한 이번 순례는 과달루페 성모님 사랑 안에서 더욱 돈독해진 회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 감사했고, 또 여러 사정으로 인해 함께하지 못한 모든 회원들과도 마음으로 함께한 순례 여정이었기에 회원 모두의 순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호성지에서 미사 참례와 성인묘역 참배 박물관 관람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잠시 들렀던 순교 일 번지 전동성당은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느낄 수 있는 은총의 장소였기에 순교자의 후손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감사한 마음 또한 가득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성모님께서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 하신대로 제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라는 순명의 말씀을 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 질수 있었듯이, 우리의 삶 안에서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드립니다.
<서울후원회 회원 김영임 젬마>

성지순례 -천호성지-

천국을 훔친 네 명의 할머니
토니오 마스코로 신부가 케냐 선교공동체에서 신앙의 본보기를 보인 네 할머니에 대해 쓴 글입니다.
하천 모양을 한 이마의 주름들
나는 존경하는 은인들에게 우리 엔공그 교구 마슈루 본당 일오숀 공동체의 네 마사이족 할머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신앙은 태산을 움직이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분명한 본보기이기 때문입니다.
지친 육신의 검은 피부를 씻어주는 하천 모양의 이마 주름들은 오랜 시간과 삶의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소망 할머니들이 세례성사를 받을 수 있었으면 …
일 년 남짓, 나는 그 마을 교리교사가 예비 세례 준비자들의 명단을 보여주어서 그 할머니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교리교사는 애원하듯 귀중품처럼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던 소망을 이야기 했는데 해마다 반복되는 소망으로 할머니들이 세례성사를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나는 교회법적 문제가 있는지, 지금까지 세례성사를 받지 못한 이유가 어떤 것인지 물었으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교회법적 장애는 없지만 몇 년 전부터 시작한 교리교육 과정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 그래요. 계속해서 세례준비교육을 시키세요. 때가 되면 하느님이 알려주시겠지요.” 라고 이야기 했다.

정말로 그녀들은 세례성사 받기를 원합니다.
올 해 초쯤, 가족과 신도들은 할머니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계속해서 간청했다. 그들은 할머니들의 연세와 질병을 우려했고, 세례성사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실까봐서 걱정했다. 그래서 다시 교리교사를 불러서 세례준비교육에 대해 물었을
때 “신부님! 문제는 그녀들이 너무 늙었다는 것입니다. 교리교육을 받는 것조차 힘든 과정입니다. 오늘 기도문을 배우면, 내일 다 잊어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먹지 않으려고 집요하게 노력합니다. 정말로 그녀들은 세례성사 받기를 원합니다.”고 말해서 나는 할머니들을 계속 교육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하느님과 소통하기 위한 고유한 언어
사순시기 동안 그 작은 마을에 미사를 거행하러 갔다. 미사는 그 할머니들중의 아들인, 파울 네시나의 집에서 거행하기로 했다. 미사를 위해 제단을 정리하는 동안 파울의 엄마가 구부정한 모습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녀의 가냘픈 몸에 불균형적으로 튀어나온 등을 보면서 인사하기 위해 다가갔다. 그녀는 바닥에 앉아 나에게 손을 내밀고 환한 미소를 지었는데 몇 안 되는 이가 드러났다.
즉석에서 북에 맞추어 시작된 노래는 성찬식의 시작을 알렸고,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묵상했다. 성체를 들어 축성할 때, 우연히 파울의 어머니의 평온한 얼굴을 보았는데 입술을 가볍게 움직이며 기도하면서 눈은 구원의 성배를 응시하고 있었다.
본당으로 돌아온 후, 성체 축성 때 빛나던 그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기억력이 쇠퇴함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신앙을 가진 할머니들이 하느님과 소통하기 위한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묵상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교리교사에게 곧 다가오는 부활절에 할머니들이 세례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집중적으로 교육해 줄 것을 부탁했고, 마을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세례를 받고 영성체를 모셨을 때 보여준 할머니들의 기쁨
부활절이 되었고, 할머니들은 지팡이에 의지하고 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곤충들의 공격을 받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낡은 교회에 일찍 도착했다. 자신들의 이름이 호명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81살의 마가켈 나시라이, 80살의 세라 올리오, 89세의 아누아리타 루티안, 83세의 세실리아 나이포샤 늙었지만 새로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증인으로 온 대모 안네 메투이와 함께 할머니들은 힘겹게 앞으로 나왔다.
아마 나는 기도문을 외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엄격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죄를 지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세례를 받고 영성체를 모셨을 때 보여준 할머니들의 기쁨이 이
마을에서 부활한 예수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신앙의 본보기라고 믿으며, 우리로 하여금 파스카의 선물에 대해 감사하기 위해 다시 하느님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신앙의 선물에 감사
네 명의 할머니들은 세례 준비과정에 충실했고, 그 중 세 명은 마슈루 본당 주보성인인 베드로 사도 축일 때, 본당을 방문한 우리 교구의 주교인 존 오바일라 오와 몬시뇰의 집도하에 견진성사까지 받았다. 가장 연세가 많은 아누아리타 할머니는 병 때문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부디 건강을 회복하길 소망한다.
나는 이 증거가 신앙의 선물에 감사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움직여주고, 예수를 따르도록 우리 삶에 영감을 주기를 하느님께 기원한다.

실린 글은 ‘ALMAS:알마스’란 잡지 기사를 번역한 것으로, 우리말로는‘영혼들’이라는 뜻을 가지며, 과달루페외방선교회에서 발행하는 선교 책자이다.

멕시코시티 선교회 본부에서 제작하여 1949년부터 지금까지 매월 발행되고 있으며, 선교사들의 경험 소개가 주 내용이다. 한 달 발행부수가 약60만부 정도(스페인어로만 발행)이고, 주로 멕시코 후원회원들에게 무료 보급되며, 미국에 거주하는 멕시코교민을 위해서도 보급되고 있다. <알마스잡지 4월호 표지>